diary/신체일기2010/09/08 04:28
다시 불면증. 분노로 각혈이라도 할 기세. 역시 인간은 무슨 짓이라도 할 수있고, 그런 짓을 하면서도 뭘하는지 모를수도 있다. 하물며 짐짓 연약하고, 동정어린 표정으로 속이는 건 일도 아니다.

욕 밖에 안 나온다. 더러운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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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鄭群:정군 鄭gun
diary/신체일기2010/09/08 04:19
아침
약식

점심
우동

저녁
고추장, 참치, 밥 = 비빔밥

커피두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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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鄭群:정군 鄭gun
essay2010/09/01 03:20
별 생각없이(목적없이) <마오쩌둥 : 실천론, 모순론>을 들고 보다가, <문화대혁명 : 또다른 기억>을 반쯤 읽었고, 중국혁명에 급격하게 관심이 기울어서 <마오쩌둥>까지 읽어버렸다. 중국공산당에서 만든 것 같은 <중국혁명사>를 대학교 때 봤었는데,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워낙 '민족'이라는 언표와 그것을 둘러싼 이데올로기들(좀 더 정확하게는 주사파)을 싫어했기 때문인지, '마오주의' 역시 대략 그런 부류로 정리하고 말았던 것이다! 책읽기가 배치의 문제와 깊이 결부된 것이라면, 사실 어떤 책도 (식상해질 수는 있지만) 낡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맑스주의도 마찬가지이다. 마오가 한 것처럼. 농민과 결부된 맑스주의, 마오는 맑스주의를 재창조했다. 레닌이 한 것처럼. 배워야 할 것은 '교의'나 '테제'가 아니라, 재발명의 기예이다.

체계, 완결성의 자리가 없다는 것, 학적인 문(門) 자체를 설치하지 않은 것은 학(學)으로서는 치명적 결합이지만 '이즘'으로서는 위대한 장점이다. 어디에서든 다시 살아나는 것, 계급분할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얼마든지 작동가능하는 것, 조건에 따라 다양한 변용이 가능하다는 것! 어떤 사유의 잠재성, 현행화의 역량은 바로 거기에서 비롯된다. 재미있게도 공동체, 꼬뮨의 역량도 열림-닫힘의 대조 속에서 측정된다. 열린 꼬뮨과 닫힌 꼬뮨.

레닌주의, 마오주의가 역사적 종말을 맞이한 이유 역시 열린 문을 닫았기 때문이 아닐까? 또는 문 자체를 없애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전파-변용되지 않는 사유는 ... 죽는다(작동하지 않는다).



예수가 기독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만들기 위해서는 바울의 '배신'이 필요했듯이, 마르크스 또한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레닌의 '배신'이 필요했다. '배신'을 당하고 이를 이겨내는 것, 자신의 원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낯선 땅에 던져서 자신을 재발명해야 하는 이 폭력적인 행위를 이겨내는 것은 '원래의' 가르침이 겪어야 하는 내적 필연성이다. 보편성은 오직 이런 방식으로만 탄생한다.
- 지젝,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266~267 or <마오쩌둥 : 실천론, 모순론>, p3

결국 '재발명'이란 '배신'의 다른 이름이다. '배신'은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 이론과 실천 '사이'. 이론과 실천의 분할 상태, 미-통일 상태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동시에 근본적으로 통일 불가능하다. 애시당초 불가능한 '통일'이기 때문에 '공작'(共作, 工作)이 일어날 수 있다. 변화는 늘 '아포리아' 속에서 일어나는 법이다. 공작자가 '이중스파이'라면, 앞으로는 대중(또는 적)을 마주하고 있고, 끊임없이 압력을 가하는 '이론'(또는 당黨)을 등지고 있는 자라면, 그의 '배신'과 '변질'은 당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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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鄭群:정군 鄭gun